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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느헤미야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주님, 어찌하여 이방의 버려진 개 같은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나이까?

사사기 6:17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표징을 보이소서...

스가랴 8: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오니,
주님의 표징을 보이소서...

누가복음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주의 성령을 부으소서.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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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생활의 원리 (마태복음 19:21)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글 저작권자: 성베드로 형제

우리가 주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계시를 받을 때,

우리는 속속들이 부패한 나 자신을 보게 되며 죄 있는 사람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는 주님의 빛 앞에 추잡하기 이를 때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면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진리를 위리가 외적으로 모을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움직일 수도 없고 남을 움직을 수도 없다.

 

지혜 - 혼적인 지혜가 있고 영적인 지혜가 있다.

혼적인 지혜는 사람의 이성에서 솟아나는 것이고, 영적인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에 공급하는 것이다.

 

Natural 자연인 에게는 이해와 지혜의 결핍은 교육으로 개선시킬 수 있으나, 교육이 타고난 재질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적인 지혜는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야 1:5) 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명심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하시는 일에 있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행 10:34)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지혜가 있건, 어리석건 간에 모두 다 같은 위치에 놓으시고 이들에게 꼭같은 구원을 하사하신다.

 

지혜로운 사람의 전존재가 부패해 있듯이 어리석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다 죄인인 것이다.

 

둘 다 영이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며, 거듭난 후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어리석은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타고난 지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할 필요도 없이 지혜로운 사람은 함께 이야기 하기가 더 용이하고 이해도 더 빨리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적인 세계에 한하는 것이지 직관적인 지식에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다.

 

구원 받은 후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영적인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보다 우선적이라고 생가지 말라.

지혜로운 사람들이 더욱 신실하게 순종하지 않는 한, 이들의 뛰어난 지적인 이해는 직관적인 지식에 아무런 보템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타고난 것이 절대로 새사람의 원천(밑바탕)이 될 수는 없다.

 

영적인 성장은 "신실한 순종"의해서 측정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은 비록 육신이 우선권을 내어줄 수 있어도 영적인 생활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영적인 경험이 있어서는 누구나 꼭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고 누구나 꼭같은 결과를 얻는다.

 

날 때부터 지혜로운 사람으로 비롯하여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따라서 누구나 영적인 깨달음(이해)를 구해야 한다.

영적인 깨달음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영적인 깨달음을 대신 할 수 없다.

 

골로새서 1:9-12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과 영교를 나누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양심이 보혈에 의하여 씻음을 받아야 한다.

신자의 양심이 씻음을 받을 때 그는 거듭나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피로 씻음(씻김)을 받는 것과 영이 중생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새생명을 받아 보혈로 양심을 정결케 함으로써 직관을 소생시켜야 한다.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들에 대하여 깨끗한가 깨끗하지 못한가, 또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지 그리스도에게 배반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증거해 준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 나중에는 완전히 성려의 음성에 연합되기 때문이다.

성령은 따라서 신자의 양심을 통하여 신자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양심이 중요한 것이지만, 양심이 우리의 거룩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기해 두자.

 

양심과 지식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거룩함에 기준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과의 교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단 한 가지 조건은 우리가 꺼리낌(죄책) 없는 양심을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양심의 지시하는 바 충분히 순종했다고 이제 "완전하다"고 스스로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선한 양심은 우리의 지식의 한도내에서 우리가 완전하다는 것을 확인해 줄 뿐이다.

우리는 즉각적인 목표에 도달했지만, 최종적인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다.

 

양심은 중요하다. 우리의 거룩한 삶의 표준은 그리스도이지 양심이 아니다.

양심은 현재의 우리의 성화된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 역할을 한다.

 

만일 우리가 야심이 가르치느 바를 따라 산다면 우리는 우리가 현재 마땅히 와있어야 하는 장소에 까지 도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것은 우리가 매인 영을 따라 행하는 일에 있어서 제일차적인 요인이다.

 

영을 따라 행하는데 있어서 성급함과 조급함은 금물이다.

 

혼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감정적으로 기울거나 이성으로 기울어 진다.

 

영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생활을 검토하고 시험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도들은 자신의 영적인 생활은 그럭저럭 어리석게 흘려 보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느낌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인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이를 세밀히 주의 깊이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때때로 사탄은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의 영을 강퍅하게 만든다.

우리의 영은 굳어져서 양보할 줄도 모르고, 협소하고 이기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영은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하여 신자느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버릴 것이며, 남에 대한 동정적이고 인정있고 부드러운 느낌을 모두 포기하게 된다.

 

또 종종 원수는 그리스도인을 유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아주 흔한 징후로써 용서할 수 없는 영을 가지게 한다.

아마도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넘어지느 것은 주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증오심과 비판심이 남의 흠을 찾아내는데 빠른 마음도 영적이 생활에 굉장한 타격을 준다.

 

만일 신자들이 이러한 태도가 자기 자신에게 나온 것이 아니고 원수에게서 기인된 것임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이들은 결고 증오심으로 부터 해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을 협소하게 제한 시킨다.

사탄은 이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경계선을 그어 스스로 남과 분리시키도록 만든다.

 

만일 누구라도 "몸으로서 교회(The Church as a body) 개념에 눈이 어두워 있다면, 그는 자기 영이 이미 협소해져 있다는 증거로써 자신을 조그만 "써클"에 내 맡긴 것이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자기 자신의 것 "내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전체 교회르 마음으로 사랑한다.

 

만일 우리의 여이 열려있다면, 생명의 강이 흘러 넘칠 것이며, 만일 우리의 영이 위축되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자신이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대범하지 않는 영은 이미 악령들의 독을 먹은 것이다.

 

사탄은 종종 신자의 영 속에 교만성을 투입시켜 스스로 증오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된척하는 마음을 유발시킨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에 자신들이 뛰어난 사람들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영은 신자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중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글 저작권자: 성베드로 형제

 

 

느낀점:

마치 워치만 니의 책을 읽는 것과 같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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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와 자녀들의 성교육

 

창세기 19:4-9

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동성애와 자녀들의 성교육

 

창세기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하여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요단 동쪽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고 고모라를 멸하시려 할 떄 아브라함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카 롯에게 기회를 줍니다.

 

롯의 집에 도착한 천사들을 소돔 사람들은 요구합니다.

즉 동성애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롯은 자기의 딸을 내어 주겠다고 제안을 했지만, 소돔사람들은 무시하고 자기들의 법관이 되려하느냐고 롯을 몰아세웁니다.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 타락의 현실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며 그들의 행위는 큰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3: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소돔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소돔 사람들의 무엇을 악하다고 했습니까?

소돔 사람들의 문화가 되어버린 동성애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며 큰 죄인 것입니다.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찾아온 이방인을 성폭행 하려고 하는 행동을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던 소돔과 고모라는

불과 유황이 비오듯 내려 멸망하고 맙니다.

 

 

동성애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요, 악인 것입니다.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법이 없을 때는 죄가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법을 정하시면 그 때부터는 죄가 드러납니다.

법은 죄를 죄로 판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성간의 성행위를 가증한 일이라고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

동성애자는 반드시 죽여야 할 죄목입니다.

 

레위기 20: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왜 사형을 시킵니까?

생각을 고쳐서 사용하면 되고, 개과천선하면 다시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동성애자를 교화시켜 다시 기회를 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둥병에 걸린자도 진 밖에 있다가 문둥병이 나으면 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동성애자에게는 그러한 교화의 과정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동성애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누구든 자기가 원하는 성별로 태어나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 것이 아니듯 성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주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는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롯은 자기의 가족을 데리고 소돔을 탈출합니다.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고, 살아 남은 사람은 롯과 두 딸입니다.

 

소돔을 탈출한 롯의 가족은 소알에 머무릅니다.

그러다 소알에 있는 것도 두려워 산으로 올라가 동굴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제 롯과 두 딸 밖에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창세기 19:31-32

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롯의 큰 딸과 작은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해서 자식을 낳습니다.

 

첫째 딸이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모압이라 했고, 둘 째 딸이 임신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암몬이라 했습니다.

 

 

롯이 그의 딸들에게 성교육을 어떻게 시켰기래 딸들이 이런 짓을 저지릅니까?

 

롯의 딸들은 왜 이런 생각을 실행에 옮길까요?

 

롯의 딸 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아버지와 동침해서 자식을 낳습니다.

 

레위기 18: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살붙이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롯은 그의 딸들에게 성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롯의 딸들은 왜 이런 근친상간의 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를까요?

 

소돔이라는 동네가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한 동네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나서 아무런 꺼리낌 없이 성적인 죄를 지어놓고도 그것이 죄인줄 모릅니다.

바로 롯의 두 딸이 그랬습니다.

 

본능적으로 여성은 자녀를 잉태하여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여성의 이러한 종족보존의 본능이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그 딸들의 생각대로 아버지와 동침을 하여 자식을 낳습니다.

 

그 자식의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신명기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암몬과 모압은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방 민족이 됩니다.

 

 

 

성적인 타락은 이렇게 자신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 까지 대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듭니다.

 

요즘 동성애를 인권이라는 시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들도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각 자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 남에게 피해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래서 동성애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니까

입양된 그 아이는 동성애 부모 밑에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래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옹호하고 묵인하겠습니까?

 

그 책임은 당신과 당신의 후손이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인은 성경에 쓰여진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은 영적인 기준 뿐만아니라 삶의 기준도 제시하는 지침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법이요, 정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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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여자의 대화.

창세기 3장 1-7절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뱀과 여자의 대화.

 

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여자: 니가 먼저 먹어봐. 자 여기 있어.

뱀: 어어어 이거 어떻하지...?

여자: 야 빨리 먹어. 너도 하나님 처럼 될거야.

 

선악과를 먹은 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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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제목: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19-21절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십자가.


서울에는 수 많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밤이 되면 붉은 십자자가 서울의 밤하늘을 수놓습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지옥에 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살아 있는 동안에 구원의 요건을 만족시키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흠잡을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소생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소위 배울만큼 배우고, 집안 좋고 배경이 좋은 그런 사람입니다. 거기에 히브리인이면서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부모님은 대기업 회장님이고 서울대학을 나와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유학하고 미국시민권 까지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아마 상위 1%에 들어가는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당하실 때 그 자리에서 돌던지는 자들의 옷을 지키고 있었던 자입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는 그런 열심히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이만하면 구원을 받을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런 까다로운 조건을 걸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가지의 사실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담당하신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만약 이 질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긴가민가 한다면, 심각하게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지 않으면 나와 예수님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부활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을 다 지킬수만 있다면 그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7:9-10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인해 죄가 악하며 율법이 선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선한 율법을 사람이 지키지 못합니다. 99개를 잘 지키다가도 한 가지를 어깁니다. 이렇게 율법을 어김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판에는 초등교사라고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이렇게 몽학선생이 도어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어떤 사람이라도 그 율법을 전부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율법을 다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성막과 제사를 주심으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만 주시고 성막과 제사를 주시지 않았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그 율법에 매여 있던 것을 벗어버리고 십자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율법이 요구하는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내 죄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을 사망이 가두어 놓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죄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율법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었던 의롭다 하심을 받는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담대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하고 있고, 한번도 예수님을 본적이 없었던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산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도 바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 안에 예수님께서 사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십니까?


이 확신이 없는 사람은 아직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그럴 수 있습니다. 아직 율법에 매여 있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율법을 어기면서 스스로 죄인인 것을 드러냅니다.


로마서 7:11-13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그래서 오늘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내 공로가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값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물이 무엇입니까? 값없이 받는 것이 선물아닙니까?

선물을 받고 값을 치룬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열어준 산 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을 굳게 붙잡고 놓치면 안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그 믿음을 떨어뜨리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까?


요한1서 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성령이 아니고서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줄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가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해야 성령과 동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령충만 함으로 매일매일을 산 제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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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안'이 논란이 되고 있다.

신명기 30:19-20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동성애와 종교의 자유.
'차별금지법안'이 논란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유'가 기독교의 '가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선악과를 먹고 지옥으로 갈 '자유'를 주신 것이다.

만약 '자유'가 좋은 것이라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구속(redeem)'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람이 죄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어 동성애를 금하고 차별하는 것이 죄가 되어야 한다면,
그 법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은 무시하는 법이다.

'자유'가 좋다고 중력의 영향이 없는 우주정거장에서 10년만 살아봐라.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대성통곡을 할 것이다.

중력이 있는 이 땅 위에서 걷고 뛰는 것이 얼마나 좋은 '자유'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란 성경에 근거한 세계관이다.

인간의 '자유의지'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의지'를 반영한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세계관이다.

가나안땅에 살든지, 소돔과 고모라에 살든지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생명'과 '복'과 '사망'과 '저주'가 내 앞에 놓여 있다.

나와 내 자손의 육체와 영혼의 생명을 걸고, 가나안을 택하든,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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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삶

마태복음 4: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제자의 삶.

베드로와 12제자는 3년 동안 부모형제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다.

베드로가 알바를 하지 않았고, 투잡을 뛰지 않았다.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제자들에게는 단지 즉각적으로 아버지와 그물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할 뿐이다.

온전한 포기와 결단.

자기 십자가.

 

누가복음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러한 자기포기와 헌신의 결과는 무엇인가?


후에 100배로 갚아주실 것이다.
그리고 영생과 핍박을 함께 주실 것이다.

마가복음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단지 지금 주님을 따르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나를 따르라!"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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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낙

전도서 3: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인생의 낙.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이제 육체의 남은 시간이 아까워지고 있는 이 때, 지나온 시간시간과 남은 시간을 생각해보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제 한달반 남았다.
12년 동안의 신학공부를 마치는 순간,
여러학교를 들어갔고 학비를 만들기 위해 회사도 운영해보고, 교만한 마음으로 멋모르고 개척도 한 번 해봤다.
...
돌아보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고난을 수천번 겪은 것 같다.

그동안 배운 신학으로 남은 인생의 시간을 달려가리가 다짐하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에 신중에 신중을 더해
나의 달려갈 길을 고민해 본다.

선교사로 나갈까?
개척을 할까?
그동안 작곡했던 찬양을 앨범으로 만들어야 하고,
성경도 만들어야 한다.

늘 어깨를 짓누르는 비전과 꿈들의 무게에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았던 20년...

내가 아니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사역을 진행시키실텐데...

그냥 평범하게 살수도 있었을 인생.
부르심이 무엇인지 구원의 혹독한 댓가를 치른것만 같아
남아 있는 고난을 슬쩍 피해가고싶기도 하다.

여전히 남은 고난 위에서 남아 있는 고난을 본다.
조급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고난을 피하고만 싶다.

내 인생에도 낙을 달라고,
비전도 꿈도 아닌 기쁨과 즐거움을 달라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

인생의 낙이 무엇인가?

전도서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인생이란 자식 키우는 것인데,
자식이 커서 결혼하고 또 자식을 낳으면
마지막 잎새처럼 흔들리는 것이 인생의 호흡인데,

인생의 낙이 무엇인가?

비가 온 뒤 더욱 추워진 이 새벽.
가을이 익어 풍성한 열매를 추수하는 이 때,

내 인생의 가을 초입에 서서 생각해 본다.

인생의 낙이 무엇인가?

내게 맡겨진 일은 무엇이고
나의 달려갈 길은 무엇인가?

전도서 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남은 육체의 시간이 지나가면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데,

내 손으로 힘을 다하여 할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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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두렙돈 기사의 구조 분석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오해

"예수님께서 과연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친 과부를 칭찬한 것일까?"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4)눅 21: 1- 4

데스크 승인 2012.09.06 09:39:24 이민규 (edit)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1. 도입: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해설

기독교인 대부분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내용으로 이해한다. 도대체 얼마나 신앙이 좋으면 대책도 없이 성전에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가 있을까? 물론 액수로 보면 그녀가 바친 두 렙돈은 지금의 1000원 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그것은 그녀에겐 생명과 같은 전부였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마음에 껄끄러운 느낌을 지우긴 어렵다. 정말 하나님은 이렇게 가난한 과부에게도 전부를 요구하시는 것일까? 그렇게 해야 그녀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인가?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말이다.

 

이 과부의 헌금을 생각하다 보면 마지막 남은 한 줌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해 먹고 아들과 죽음을 준비하던 궁핍한 사렙다 과부에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엘리야가 생각난다(눅 4:25-6; 왕상 17:8~15). 정말 철면피 같은 선지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과부의 마지막 것을 빼앗는 듯한 엘리야의 요구는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 스토리의 결말을 알기에 엘리야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녀의 순종을 보시고 엘리야를 통해 밀가루와 기름을 차고 넘치게 공급하셨다는 것을!

 

그렇다면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친 과부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도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 본문은 여기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본문을 보면 그녀의 믿음을 칭찬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과연 본문은 모범적인 헌금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혹시 다른 깊이 있는 내용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본문의 구조를 위한 문맥설정

 

어느 경우에도 성경 해석의 가장 기본은 본문의 문맥과 저자의 전반적인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먼저 문맥을 보자. 이 내용을 누가복음 21:1~4절이 아니라 20:45~21:6절로 볼 때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원래 성경에는 장, 절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찬찬히 특히 밑줄 친 부분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자.

 

[본문제시]

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3. 본문구조의 3단 해석

본문의 구조는 단순하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 그리고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치는 과부, 그리고 그러한 헌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종교 지도자의 탐욕으로 희생된 과부와 헌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부를 자랑하는 성전을 심판한 내용으로 변한다.

 

강도의 소굴에 재산 바친 과부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하여 분노하셨다(막 11:17; 마 21:13; 눅 17:46). 그것은 성전 안에서 성전 당국자들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장사치들의 매매로부터 이익을 챙긴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단죄였다. 그리고 성전 청결을 통해 성전이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 주셨다(눅 19:46; 마 21:12~13; 막 11:15~18; 요 2:13~16).

 

맙소사! 그렇다면 이 과부는 강도의 소굴에 헌신적으로 전 재산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푼까지 바치게 하는 율법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강도들은 부유해지고 그들의 소굴은 날로 화려해지고 있었다.

 

당시 성전에 생활비 전부를 바친 그녀는 생명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사렙다 과부처럼 자신도 전부를 바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성전에 헌금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생활비를 다 바쳐서라도 신명기적인 하나님의 물질 축복을 받아 내야 한다고 외친 종교 지도자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종교적 착취는 경제적 압제보다 단수가 더 높다. 종교 권력은 물리적 방법을 동원해 강탈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는 돈뿐 아니라 마음까지 빼앗긴다.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과부는 쉽게 탐욕적인 종교 지도자의 먹잇감이 된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전부를 바쳤을 것이다. 아마도 사렙다 과부의 결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말이다. 그러나 탐욕에 물든 종교적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과부는 더 가난해지고 종교 지도자는 더 부유해지기만 한다.

 

문제는 성전 당국자들과 율법 지도자들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던 엘리야와 달리 탐욕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과부를 착취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당시 알려진 것으로는 과부가 바친 "한 줌의 고운 가루"를 작은 예물이라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 제사장의 이야기(Lev. Rab 3.5 [레 1:17에 대한]), 쿰란 공동체의 과부들을 강탈하는 예루살렘 제사장 단을 비난하고 과부들이 경제적 궁핍으로 말미암아 매춘을 하는 현실을 한탄하는 이야기(4Q270 5, 19)가 있었다. 또한, 구약 선지자들의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비판과 심판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렘 7:6).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사회 경제적 결핍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율법은 그들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보호를 명한다. 누구도 "과부나 고아를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이다(출 22:22). 신명기 언약은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공의를 베푸시는(신 10:18)" 분으로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소외된 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한다(신 24:17; 27:19). 고아와 과부는 십일조 복지 제도의 우선 대상이다(신 14:29; 26:12-13).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사 10:2). 초대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받들어 과부의 가산을 탐하는 것을 비난하였고(막 12:40), 참된 경건에 과부를 돌보는 것을 포함했다(약 1:27).

 

4.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 지은 성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저들은(부자들)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눅 21:3~4) 과부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착취당하는 과부에 대한 한탄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성전과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탐욕을 경고하고 종교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잘 들어맞는다. 탐욕스러운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강도'요, 가난한 자의 헌물로 사치스럽게 꾸민 성전은 사실 그들의 '소굴'이라는 실상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이 본문에 나타난 과부의 이야기이다.

 

당시 성전이 무너지게 된 것은 단순히 로마의 침략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본문의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과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생활비까지 착취당하는 과부를 보며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성전의 멸망을 불러온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성전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강도의 소굴이 무너지고, 강도들이 심판받은 것뿐이다.

 

성공하고 복 받으려면 헌금 많이 해야?

 

오늘날 만일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인 극빈한 과부가 끼니를 때울 마지막 남은 몇천 원의 생활비를 교회 헌금함에 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을 바라보며 그녀의 믿음을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그녀는 혹시 일부 탐욕적인 부흥사의 기복적인 설교로 말미암은 희생자는 아닐까?

 

그녀가 어떤 동기로 헌금하였는지 물론 중요할 것이다. 만일 어려운 중에서도 풍성하고 즐겁고 아낌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에 동참하는 모습이라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규범이 되는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후 9:7). 그리고 교회는 그녀의 헌금을 어떤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욱 귀히 여기는 동시에 사렙다 과부의 결말을 그녀가 체험하도록 가난한 자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을 함께 실현해야 한다. 당시 유대 성전처럼 차별하고 착취하지 말고 초대교회가 결핍한 과부들의 생계를 도와주었던 것처럼(행 6:1)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도 초대받고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천국 잔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로운 신약의 성전인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 재정을 늘리기 위해 인간의 성공과 부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거나, 가난한 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교묘하게 이용한다면 그 책임을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와 신학에서 먼저 찾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때 가톨릭교회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성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해 성경적으로 사실무근인 신학과 온갖 감언이설로 이미 죽은 가족이나 조상에까지 적용되는 죄 사함, 천국 보장, 물질 축복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어 가난한 대중들에게 헌금을 바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5. 한국교회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평가

오늘날 목회자 중 특히 부흥사들 가운데 교회 건축과 재정을 늘리기 위해 온갖 세상의 축복과 헌금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키고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고 싶은 목회적 야망으로 말미암아 온갖 기복적인 축복을 받을 것이라 약속하며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곳은 심판의 대상인 강도의 소굴일 뿐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오늘날 절박한 상황에서 전 재산을 성전에 바친 과부의 이야기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라 칭찬하며 성도의 처한 상황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면 제발 반성해라!

 

"니가 바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본문의 종교 지도자야, 짜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데스크 승인 2007.09.26 10:55:43 오세용 (seyoh)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1. 도입: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해설

누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 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2. 본문의 구조를 위한 문맥설정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3. 본문구조의 3단 해석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본문제시]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4.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 지은 성전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5. 한국교회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평가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Evansville 제자교회 담임목사

(현) 전주 강림교회 협동목사

수병원 원목

<저서>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아담은 공처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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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불, 소멸하는 불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소멸하는 불.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수도 있고, 소멸하실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소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너무나 질투하시기 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랑하기에 질투하십니다.

아가 8:6-7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물도 그 불을 끄지 못합니다. 홍수라도 삼킬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에 품기운 사랑이며,
하나님의 팔에 붙들린 도장, 즉 반지와 같은 사랑, 영원한 언약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의 구원을 끝을 수 없고,
그 무엇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의 불과 같듯이,
하나님의 질투도 불과 같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어떤 우상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신명기 5:7-10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불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질투 역시 불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죄악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돌아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시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바로 그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순간까지,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질투하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사,
채찍의 고통과 십자가의 형벌을 받게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덮어버렸습니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제 그 사랑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야 그 사랑을 알 수 있을까요?

많은 물로도, 홍수라도 삼킬 수 없는 그 사랑.
지옥의 불길과 같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하나님의 불은 제단 위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불은 제단위의 모든 제물을 소멸하도록 사르는 불입니다.

열왕기상 18:37-38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여호와의 불은 임하는 것입니다.

나무와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많은 물로도 끌 수 없는 여호와의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대결을 할 때,
다른 방법이 아닌 제사를 드림으로 여호와의 불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불이 임할 때 우리의 그 어떤 죄악도,
우리의 그 어떤 죄악된 자아도 남겨질 수 없습니다.
그 거룩한 불 속에 소멸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여호와의 불이 임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런 예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나는 그런 불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예배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임하는 예배,
지옥의 불과 같이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그런 예배를...

예배 가운데 여호와의 불은 설교를 통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설교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바위라도 부스러뜨리는 강력한 여호와의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 그런 설교자.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다 불사를 수 있는 설교자.

나는 그런 불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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