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의 두렙돈 기사의 구조 분석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오해 "예수님께서 과연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친 과부를 칭찬한 것일까?" |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4)눅 21: 1- 4 |
데스크 승인 2012.09.06 09:39:24 이민규 (edit)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1. 도입: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해설 기독교인 대부분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내용으로 이해한다. 도대체 얼마나 신앙이 좋으면 대책도 없이 성전에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가 있을까? 물론 액수로 보면 그녀가 바친 두 렙돈은 지금의 1000원 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그것은 그녀에겐 생명과 같은 전부였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마음에 껄끄러운 느낌을 지우긴 어렵다. 정말 하나님은 이렇게 가난한 과부에게도 전부를 요구하시는 것일까? 그렇게 해야 그녀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인가?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말이다.
이 과부의 헌금을 생각하다 보면 마지막 남은 한 줌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해 먹고 아들과 죽음을 준비하던 궁핍한 사렙다 과부에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엘리야가 생각난다(눅 4:25-6; 왕상 17:8~15). 정말 철면피 같은 선지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과부의 마지막 것을 빼앗는 듯한 엘리야의 요구는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 스토리의 결말을 알기에 엘리야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녀의 순종을 보시고 엘리야를 통해 밀가루와 기름을 차고 넘치게 공급하셨다는 것을!
그렇다면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친 과부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도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 본문은 여기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본문을 보면 그녀의 믿음을 칭찬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과연 본문은 모범적인 헌금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혹시 다른 깊이 있는 내용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본문의 구조를 위한 문맥설정
어느 경우에도 성경 해석의 가장 기본은 본문의 문맥과 저자의 전반적인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먼저 문맥을 보자. 이 내용을 누가복음 21:1~4절이 아니라 20:45~21:6절로 볼 때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원래 성경에는 장, 절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찬찬히 특히 밑줄 친 부분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자.
[본문제시] 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3. 본문구조의 3단 해석 본문의 구조는 단순하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 그리고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치는 과부, 그리고 그러한 헌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종교 지도자의 탐욕으로 희생된 과부와 헌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부를 자랑하는 성전을 심판한 내용으로 변한다.
강도의 소굴에 재산 바친 과부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하여 분노하셨다(막 11:17; 마 21:13; 눅 17:46). 그것은 성전 안에서 성전 당국자들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장사치들의 매매로부터 이익을 챙긴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단죄였다. 그리고 성전 청결을 통해 성전이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 주셨다(눅 19:46; 마 21:12~13; 막 11:15~18; 요 2:13~16).
맙소사! 그렇다면 이 과부는 강도의 소굴에 헌신적으로 전 재산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푼까지 바치게 하는 율법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강도들은 부유해지고 그들의 소굴은 날로 화려해지고 있었다.
당시 성전에 생활비 전부를 바친 그녀는 생명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사렙다 과부처럼 자신도 전부를 바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성전에 헌금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생활비를 다 바쳐서라도 신명기적인 하나님의 물질 축복을 받아 내야 한다고 외친 종교 지도자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종교적 착취는 경제적 압제보다 단수가 더 높다. 종교 권력은 물리적 방법을 동원해 강탈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는 돈뿐 아니라 마음까지 빼앗긴다.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과부는 쉽게 탐욕적인 종교 지도자의 먹잇감이 된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전부를 바쳤을 것이다. 아마도 사렙다 과부의 결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말이다. 그러나 탐욕에 물든 종교적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과부는 더 가난해지고 종교 지도자는 더 부유해지기만 한다.
문제는 성전 당국자들과 율법 지도자들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던 엘리야와 달리 탐욕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과부를 착취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당시 알려진 것으로는 과부가 바친 "한 줌의 고운 가루"를 작은 예물이라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 제사장의 이야기(Lev. Rab 3.5 [레 1:17에 대한]), 쿰란 공동체의 과부들을 강탈하는 예루살렘 제사장 단을 비난하고 과부들이 경제적 궁핍으로 말미암아 매춘을 하는 현실을 한탄하는 이야기(4Q270 5, 19)가 있었다. 또한, 구약 선지자들의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비판과 심판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렘 7:6).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사회 경제적 결핍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율법은 그들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보호를 명한다. 누구도 "과부나 고아를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이다(출 22:22). 신명기 언약은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공의를 베푸시는(신 10:18)" 분으로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소외된 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한다(신 24:17; 27:19). 고아와 과부는 십일조 복지 제도의 우선 대상이다(신 14:29; 26:12-13).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사 10:2). 초대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받들어 과부의 가산을 탐하는 것을 비난하였고(막 12:40), 참된 경건에 과부를 돌보는 것을 포함했다(약 1:27).
4.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 지은 성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저들은(부자들)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눅 21:3~4) 과부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착취당하는 과부에 대한 한탄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성전과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탐욕을 경고하고 종교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잘 들어맞는다. 탐욕스러운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강도'요, 가난한 자의 헌물로 사치스럽게 꾸민 성전은 사실 그들의 '소굴'이라는 실상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이 본문에 나타난 과부의 이야기이다.
당시 성전이 무너지게 된 것은 단순히 로마의 침략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본문의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과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생활비까지 착취당하는 과부를 보며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성전의 멸망을 불러온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성전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강도의 소굴이 무너지고, 강도들이 심판받은 것뿐이다.
성공하고 복 받으려면 헌금 많이 해야?
오늘날 만일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인 극빈한 과부가 끼니를 때울 마지막 남은 몇천 원의 생활비를 교회 헌금함에 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을 바라보며 그녀의 믿음을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그녀는 혹시 일부 탐욕적인 부흥사의 기복적인 설교로 말미암은 희생자는 아닐까?
그녀가 어떤 동기로 헌금하였는지 물론 중요할 것이다. 만일 어려운 중에서도 풍성하고 즐겁고 아낌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에 동참하는 모습이라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규범이 되는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후 9:7). 그리고 교회는 그녀의 헌금을 어떤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욱 귀히 여기는 동시에 사렙다 과부의 결말을 그녀가 체험하도록 가난한 자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을 함께 실현해야 한다. 당시 유대 성전처럼 차별하고 착취하지 말고 초대교회가 결핍한 과부들의 생계를 도와주었던 것처럼(행 6:1)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도 초대받고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천국 잔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로운 신약의 성전인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 재정을 늘리기 위해 인간의 성공과 부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거나, 가난한 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교묘하게 이용한다면 그 책임을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와 신학에서 먼저 찾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때 가톨릭교회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성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해 성경적으로 사실무근인 신학과 온갖 감언이설로 이미 죽은 가족이나 조상에까지 적용되는 죄 사함, 천국 보장, 물질 축복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어 가난한 대중들에게 헌금을 바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5. 한국교회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평가 오늘날 목회자 중 특히 부흥사들 가운데 교회 건축과 재정을 늘리기 위해 온갖 세상의 축복과 헌금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키고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고 싶은 목회적 야망으로 말미암아 온갖 기복적인 축복을 받을 것이라 약속하며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곳은 심판의 대상인 강도의 소굴일 뿐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오늘날 절박한 상황에서 전 재산을 성전에 바친 과부의 이야기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라 칭찬하며 성도의 처한 상황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면 제발 반성해라!
"니가 바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본문의 종교 지도자야, 짜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
데스크 승인 2007.09.26 10:55:43 오세용 (seyoh)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1. 도입: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해설 누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 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2. 본문의 구조를 위한 문맥설정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3. 본문구조의 3단 해석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본문제시]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4.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 지은 성전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5. 한국교회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평가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Evansville 제자교회 담임목사 (현) 전주 강림교회 협동목사 수병원 원목 <저서>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아담은 공처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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